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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꽃보다 마흔 님과 함께하는 매일매일 글쓰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쨍하고 해뜬날입니다.
저의 꿈은' 내 인생에서 1권의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부터 결심했습니다.
1년에 최소한 50권의 책을 읽고 도서 후기를 쓰자!
그리고 반드시 책 1권을 출판하자. 그러다가 활동을 함께하는 동료를 통해 '꽃보다 마흔과 함께하는 매일매일 글쓰기'라는 모임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오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글쓰기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생각하며 느끼며 배우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여러분과 공유하려고 합니다.

 

 

 

 

겨울의 기억

 

 

 

하얀 겨울이 되면 나는 항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깔깔깔, 호호호, 하하하, 세 명의 아이가 눈사람 주변을 빙글빙글 웃으면서 돈다. 작은 눈으로 만든 눈 집 속에 들어가 작은 촛불을 움푹 쌓인 눈 속에 꽂아 놓고, 그 앞에서 손을 비비며 입으로 호호 불어 시린 손을 녹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은 이렇게 겨울마다 집 앞마당에서 눈을 가지고 놀았다.

 

시골이었던 마을에는 겨울에 유독 눈이 많이 왔다. 발이 푹푹 들어갈 정도로 눈이 쌓였다. 눈이 많이 오면 엄마는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이 싫었나 보다. 투덜투덜거렸던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나는 참 좋았다. 눈이 마당에 가득 쌓이는 날에는 오빠와 남동생과 함께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며 정말 신나게 놀았다. 특히 내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작은 이글루 같은 눈 집을 만들어 그 속에 3명이 들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촛불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고구마나 곶감 같은 간식거리도 가져와 참으로 맛나게 먹었다. 하하하, 호호호, 크크크.

 

 

 

오빠와의 재회와 이별

 

어릴 때 오빠와 나는 참 사이가 좋았다. 청소년기 때 잠깐 사이가 멀어지고 어색해졌지만, 어른이 되면서 다시 친하게 지냈다. 내가 해외에서 생활할 때 내 집을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오빠가 법무사 공부를 하고 있어서 내 집을 오빠가 관리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 편히 오빠에게 전적으로 내 집을 맡겼다. 이 일을 계기로 나와 오빠는 더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3년의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해외에 있어서 많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한국에 갈 때마다 오빠를 만났다. 해외 생활 동안 집 두 채를 소유하게 된 나는 오빠가 빨리 회복되어 다시 내 집을 관리해주기를 바랐다.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오빠의 회복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오빠의 뇌졸증으로 인한 부분 마비 증세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덜 회복된 몸이었지만 오빠는 한국에 있는 내 집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전화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몸이 아파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미안하다고 말했다. 오빠가 홀연히 떠나기 하루 전날도 나는 집 문제로 오빠와 통화했었다.

 

“응 알았어.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알아보고 통화하자, 고마워. 조금씩이라도 운동하고 그래, 알았지? 내일 통화해, 응, 안녕.”

 

이것이 오빠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파리 시간으로 오후 4시나 5시쯤일까? 갑자기 조카로부터 내 카톡으로 전화가 왔다. “고모, 아빠가 지금 응급실에 실려갔어.” 아마 한국 시간으로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1월 겨울의 한밤중이라 가족들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나와 통화를 자주 했던 조카는 내 카톡을 알고 있었고 나는 오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오빠는 그 이후로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갑자기 오빠는 우리 곁을 떠났다. 오빠 나이 54세였다. 아직은 젊은 나이가 아닌가?

 

 

 

다시 찾아온 겨울

 

 

나는 얼마동안 이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어제 분명 나와 통화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그저 머나먼 남의 이야기로 들렸다.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나는 오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부모의 죽음 아니면 형제자매 장례식에 가는 것도 코로나19 당시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마침 한국에 있는 딸이 오빠 발인하는 장면을 녹화해서 나중에 파리로 돌아올 때 나에게 보여주었다. 엄마가 너무 충격받을까 봐 녹화한 비디오를 나에게 그날 바로 전송해 줄 수 없었다고 딸이 나중에 말했다.

 

나는 오빠 발인하는 비디오를 볼 때마다 운다. 지금도 그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결코 지울 수 없었다. 오빠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많은 고마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오빠를 그리워하며 요즘도 운다. 겨울이 다시 찾아오고 있다. 흰 눈이 내린다. 까무잡잡하고 코 흘리는 단발머리 여자아이와 까까머리 머슴아 둘이 앞마당을 뛰어다닌다. 눈싸움을 하면서 자지러지게 웃는다. “하하하~. 아, 손 시려, 호호호.” 하얀 입김이 뽀얗게 나풀거린다.

 

‘마음씨 착한 오빠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겠지.’

 

“오빠, 오빠도 어릴 적 이 장면 혹시 기억나? 궁금하네?”

 

 

 

 

 

 

 

오늘도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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