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철은 인기 있는 도슨트로, '도슨트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1989년생으로,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미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전시회에서 활동하며 관람객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미술을 설명하는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021년에는 첫 저서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출간했습니다. 현재는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습니다.
폴 고갱
나는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폴 고갱
35살의 나이에 고개의 마음은 '화가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때 딸, 알린 외에는 아무도 그의 화가의 길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때 고갱은 그림도 잘 팔리지 않고, 일정한 수입도 없었죠.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난에도 고갱은 지칠지언정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민끝에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혁신'의 결론을 내리고 답답한 도시를 떠나 페루의 뜨거운 태양의 원시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프랑스령 가장 끝단,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떠납니다.
고갱이 가장 영향을 받는 화가는 폴 세잔'입니다. 고갱은 세잔처럼 '본질을 보는 관점'' 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고갱은 자신만의 기법을 찾고 집중하였지만 대중의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갱은 자연의 색을 무시한채 자신만의 색을 상상해서 작업을 합니다. 고갱은 자연의 색이 아닌 자신만의 색과 거리감을 표현하는데 완전히 익숙해집니다. 고갱은 그림을 통해서 자신만의 예술을 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파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고흐와 다투고 헤어진 후 알폰스 무하의 후원을 받은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에서 고갱은 완전한 자신만의 색을 찾아냅니다. 타히티섬에서 작품에만 몰두하던 고갱을 다시 파리로 향하지만 다시 한번 쓰디쓴 패래를 맛봅니다. 여전히 대중들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눈물을 쏟으며 파리를 떠나 타히티에 도착합니다. 이때 고갱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가장 사랑했던 딸, 알린의 사망소식, 아내 매테의 이혼통보, 두번째 부인 안나가 그림까지 가지고 도망가버리는 사건등, 그를 죽음이라는 절망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그의 평생에 걸쳐, 목숨까지 바쳐 그렸던 작품,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파리에서 소위 대박이 납니다. 비싼 값에 팔렸고, 그 이후에 고갱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타이티에 죽가까지 머문 고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햇지만 뭔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시절 페루에서 느꼈던 낭만과 행복을 찾기 위해 평생을 유랑했던 고갱은 자신의 캔바스에서 진정한 '유토피아'를 발견한것 같았습니다.
고갱이 비록 가족들을 외면했고,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초기에 받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서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는 '앙리 마티스'가 있습니다. 또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모옴'이 있습니다. '달과 6펜스'가 고갱의 발자취를 집필한 소설입니다. 뿐만아니라 가수 엘튼 존의 노래' 고갱 고즈 할리우드'라는 곡도 고갱에 관한 노래입니다.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불행했던 시절이 훨씬 길지만, 마침내 세상에 이름을 남기며 오늘날까지 위대한 에술가로 거론되는 고갱, 그를 떠올릴 때면 에술에의 갈망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지 새삼 절감합니다.
나의 한 문장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폴 고갱을 잘 몰랐고, 그이 작품들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나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고갱을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끌로드 모네나 르느와르, 마네와 같은 자연을 담은 그림, 화사한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좋아한다. 고갱처럼 강렬한 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새롭게 고갱의 작품을 보니, 작품의 담긴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그림을 끝까지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관심받고, 그 당시에 부유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대에 편승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대다수를 포함해서 나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서 고갱이 위대한 화가'라 불리운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새로운 에술의 세계를 열었고, 그 길을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고갱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 콜롬버스처럼, 그림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한 인물이니까 말이다.
늦은 나이에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단지 글만 쓰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노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매일 책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 때로는 회의가 든다. 경제 문제를 오로지 남편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고 늘 미안하다.
누구는 동시에 돈도 벌고 글도 쓰고 자신만의 온라인 건물도 구축하는데, 이제사 병아리 걸음마를 시작한 글쟁이이고, 온라인 건물도 이제사 하나씩 벽돌을 놓고 있으며, 내가 하는 교사로서는 겨우 식비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노후 준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여행 작가 한답시고 여행다니고, 매일 책읽고, 글을 써야 하는게 과연 맞는 일일까?를 책상앞에 앉아서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고갱을 통해서 용기를 얻는다. 늦었지만 꾸준하게 글을 쓰자, 내가 경험한 내용들을 글로 하나씩 써내려가자. 하나씩 책으로 만들어가자, 나의 이런 용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자. 또한 한국어 교사로서 직업은 소홀히 하지 말자.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진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이 직업또한 성실히 하자. 고갱의 그림과 탐구정신은 배워야 겠지만, 그를 반면교사 삼아서 나는 적어도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되자. 다행히 아이들은 다 컸으니 자기 밥벌이는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생활비는 내가 번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나의 길을 폴 고갱처럼 가야 겠다'.
여러분도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사람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꿈입니까?
폴 고갱의 인생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통해 영감을 받으십시오.
만약 그 길이 옳은 길이라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걸어가십시오. 분명 그 길 끝에 행운의 여신이 환하게 웃으며 두팔 벌려 여러분을 맞이해 줄 겁니다.